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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시간: 2010-9-4 0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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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대형다큐멘터리 중국관내의 조선민족(5)-혈흔 <BR> <BR> <BR>1991년 3월 1일, 드디여 조선반도에서 일본제국주의침략을 반대하고 국권의 회복과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하는 거족적 반일항쟁인 “3.1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자 조선반도 전국 218개 군에서 200여만명이 궐기하였다. “독립 만세!”소리가 하늘을 뒤흔든다. 태극기를 흔드는 사람, 흐느끼는 사람, 가쁜 숨을 몰아쉬는 사람, 격투소리, 총소리, 조선반도 전체가 흥분의 도가니로 변하였다. 이날은 일제“헌병통캇10년동안 바라볼수 없었던, 아침의 태양을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처음 바라보던 날이였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며...</P>
<P>이에 호응하여 세계 각지의 조선인들이 일어났다. “3.1독립운동”을 성원하여 중국 연변땅에서 일제를 반대하는 “3.13운동”이 일어났다. 무려 3만여명의 조선인군중들이 일떠나 룡정촌에 모여 시위를 벌렸다. “3.13운동”의 봉화는 연변땅에 항쟁의 불씨를 심어놓았다.</P>
<P>“3.1독립운동”은 독립운동기치를 고양하여 독립쟁취 기초를 만드는데 대성공하였다. 이 운동은 일제의 헌병통치와 조선민족 말살정책에 금이 가게 하여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최소한의 자유를 쟁취했고 민족을 보존하기 위한 민족문화운동과 민족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할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던 것이다.</P>
<P>1919년 3월 23일, 중국의 조기공산주의자 진독수는 “매주평론”에 문장을 발표하여 조선의 “3.1운동”을 높이 평가하였다.</P>
<P>조선반도에서 “3.1운동”이 일어난 뒤 두달 나흘만인 1919년 5월 4일 중국에서도 거세찬 반제반반봉건애국군중운동인 “5.4”운동이 일어났다. “5.4”운동이 도화선은 무엇인가?</P>
<P>당시 제1차세계대전의 전승국들이 프랑스에 모여 전쟁이후 평화회의를 소집하였는데 회의에서는 중국대표의 초기에 제출한 “‘21개 불평등조약’을 페제”할 요구를 무리하게 부결하고 원 독일에서 얻었던 산동의 일체 권익을 일본에 넘겨버렸다. 이 소식이 중국에 전해오자 전국인민들의 강렬한 분노를 일으키게 되었다.</P>
<P>1919년 5월 4일, 북경의 수천명 애국적학생들이 천안문앞에서 집회를 가지고 제국주의와 매국적을 규탄하는 연설을 발표하고 시위행진을 단행하였는데 이 운동은 전국에 신속히 파급되였다. 전국방방곡곡에서 “외부로 국권을 되찾고 내부로 국적을 징벌하라!” “21개 조약을 페지하라!” “청도를 되돌리라!”는 구호가 퍼졌다. 장강남북, 장성내외, 20여개 성과 100여개 대중도시 군중들이 운동에 참가하였다. 상해를 선두로 전국의 로동자들이 파업을 단행하고 상인들도 일떠났다.</P>
<P>적지 않은 조선청년들도 위대한 “5.4운동”에 뛰여들었다. 당시 북경에 거주하고있던 수백명의 조선청년학생들과 반일민족주의 인사들은 가두에 나가 연극을 놀고 강연을 하며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저명한 중국공산당원이며 “2.7대파업” 지도자의 한분이였던 시양(施洋)은 조선학생들을 동원하여 북경, 무한에서 많은 강연회를 조직했다고 한다. 조선학생들은 시양의 인솔하에 여러 지방에 다니며 강연했는데 그들은 “조선이 왜 망했는가, 중국인민이 일떠나 일제를 반대하지 않는다면 조선과 같은 망국의 길을 걷게 된다.”, “우리의 투쟁은 4억 중국민중의 잠을 깨우고 있다. 중국과 조선은 협력하여 싸워야 한다. 이것은 하나의 세계적운동으로서 금후에도 계속 전진할것이다”라고 했다.</P>
<P>중국의 위대한 “5.4애국운동”중에서 중국로동계급은 독립적인 정치력량으로 처음으로 력사무대에 등장했으며 초보적인 공산주의사상을 갖고있던 지식인들이 이때로부터 로동자들속에 들어가 맑스레닌주의를 전파하고 맑스레닌주의와 중국로동자운동을 결합함으로써 중국공산당의 건립에 사상, 조직상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P>
<P>조선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 이 두 운동에는 비슷한 점이 있다. “나라의 국권을 되찾고 제국주의를 반대한다”는 슬로건, 이것이 두 운동의 공동한 정신이다. 중국인민과 조선인민들은 “3.1운동”, “5.4운동” 등 격변기를 거치면서 함께 고락을 나누고 피를 흘리며 민족해방의 길을 탐색하고있었다. 력사는 바야흐로 민족해방투쟁에서의 세대의 교체를 미룰수 없는 과업으로 제기히였다. 10월 사회주의혁명의 승리는 세계 약속민족해방운동의 려명기를 하였다.</P>
<P>조기공산주의자 리동휘</P>
<P>1919년 “3.1”운동이후 조선은 나름대로 들끊고있는 반일운동을 조직, 지도할수 있는 지도부가 시급히 수요되였다. 시대적요구에 순응하여 각지에서 림시정부수립운동이 전개되였다.</P>
<P>1919년 2월 25일, 로씨야 연해주 니꼴리스크에서 재로조선인대표와 간도대표들에 의하여 “대한민국의회”가 수립되였고 4월 13일 중국상해에서 리동녕을 의정원 의장으로 리승만을 국무원총리로 한 “상해림시정부”가 설립을 고하였다.</P>
<P>이와 동시에 조선국내에서도 천도교를 중심으로 “대한 민간정부”가 출범했고 평안도에서 리동휘를 집정관으로 하는 “신한국민정부”가 탄생했으며 서울에서 리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리동휘를 국무총리총재로 하는 “한성림시정부”가 출범하였고 손병휘를 대통령으로 하는 “조선민국림시정부”도 출범을 시도했다.</P>
<P>이와 같이 “3.1”운동후 6개곳에서 림시정부가 수립됐거나 수립되려는 림시정부는 모두 군주제의 의식구조에서 벗어나 의헌이고 기헌인 “민주공화정부”의 출현을 강력히 추진하는 획기적인 전환이였다는 것을 시사했다. 그리고 6개 “림정”에서는 종파와 학벌을 초월하여 능력에 따라 각원을 추대했다.</P>
<P>그러나 이러한 림시정부의 수립은 적당한 거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였다. 조선국내는 물론이고 중국의 동북삼성이나 로씨야의 씨비리아에는 일본군이 주둔해있으므로 불가능했고 미주 하와이 일대는 조선과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서 역시 적합한곳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국제도시인 상해만이 비교적 적합한 지역인 것이다.</P>
<P>중국 상해, 중국의 가장 큰 경제중심이며 력사문화 명성이다. 상해는 700여년의 력사를 갖고있는 옛도시로서 장강 삼각주의 장강 출구에 위치하고있으며 중국의 중요한 문호이다. 17세기로부터 이곳은 번화한 항구이다. 1840년 아편전쟁이후로부터 근 100여년간 상해는 중국에 대한 제국주의의 정치, 경제, 문화, 침략의 중요한 거점으로 되었다. 1842년 영제국주의 청정부를 강박하여 “남경조약”을 체결하고 상해를 5개 통상구의 하나로 정하였다. 뒤이어 미국, 프랑스 제국주의도 청정부를 핍박하여 불평등조약을 체결하고 조계지를 만들고 해관을 점령하고 군대를 주둔시켰으며 순포방을 설립하고 령사재판권을 획득했다. 이러한 특권의 보호밑에 제국주의자들은 상해에 대량의 상품을 경영하여고 잇달아 은행, 공장을 세웠으며 여러 가지 공공사업을 경영하고 마약을 팔았다. 당시 상해는 “모험가의 락원”으로 되었으며 이때로부터 점차 공상업이 기형적으로 발전하는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성질의 국제도시로 변하게 되었다.</P>
<P>한편 이같은 립지적 호조건에 힘입어 해외에서 가장 먼저 독립운동을 계획한곳은 상해였으며 그 시간은 1918년 8월 하순경이며 그 주체는 동제사의 소장파들인 려운형(呂運亨), 장덕수(張德秀), 선우혁(鮮于爀), 김철(金徹), 조동우(趙東祐), 한진교(韓鎭敎), 김규식, 서병호 등이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결성한 신한청년당이였다.</P>
<P>이와 때를 같이하여 일찍부터 개화운동과 언론활동에 혼신을 바쳐오던 독립투사 리동녕(李東寧) 등 30여명의 유명지인들이 속속 상해에 도착하였다.</P>
<P>각 지방에서 모여온 망명지사들은 중국 상해 청방두령인 두월생(杜月笙)의 주선으로 청사를 얻어 1919년 4월 9일 손정도(孫貞道), 리광수(李光洙)의 건의로 10일과 11일, 프랑스조계지 김신부로(金神父路) 22호에서 29명의 의원이 출석하여 의정원을 구성한 뒤 제1회 림시의정원회의를 열고 국무원을 선거하고 4월 13일에는 이를 국내외에 정식으로 공포하였다.</P>
<P>그러나 여러개의 림시정부 수립은 항일투쟁에서 분산과 혼란, 통일의 약화를 초래하기에 당연히 그 통합이 요청되였다. 각 “림정”에서 통합을 모색하던중 미국에 있던 도산 안창호선생이 상해에 도착하게 되었다.</P>
<P>“안창호선생이 로씨야에 편지를 했습니다. 반드시 리동휘선생을 모셔오라는것이였습니다. 로씨야에 있는 의회정부와 상해에 있는 림시정부가 합병하지 못하더라도 리동휘를 모셔와야 한다는것이였습니다.” 연변대학 박창욱교수의 지적이다.</P>
<P>이리하여 리동휘가 령도하던 로씨야 “대한국민의회정부”가 주동적으로 해산을 결의하고 상해로 왔고 1919년 8월 18일부터 9월 17일까지 상해에서 제6회 림시의정원회의가 개최되며 새 헌법이 공포되고 통합된 단일 정부인 “대한림시정부”가 출범되였다.</P>
<P>당시 대한림시정부가 가 부서 책임자는 다음과 같다.</P>
<P>대통령에 리승만, 림시정부 국무총리에 리동휘, 내무총장에 리동녕, 외무총장에 박용만, 군무총장에 로백린, 재무총장에 리시영, 법무총장에 신규식, 학무총장에 김규식, 교통총장에 문창범, 로동국총장에 안창호였다.</P>
<P>“리동휘선생은 국무총리로 당선된후 당시 미국에 있는 리승만한테 편지를 보냈습니다. ‘각하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는데 각하의 의견은 조선이 외교수단으로 위탁정치를 해야 합니까? 저의 의견은 독립전쟁만이 조선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각하가 저의 의견을 동의한다면 그 방안을 내놓으시오’라고 했답니다. 1920년 설 안창호선생은 신년연설에서 ‘우리는 마땅히 리동휘선생의 독립전쟁을 받들어야 한다. 만약에 리동휘의 독립전쟁론을 받들지 않으면 곧 조선독립을 반대하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어 림시정부가 비로서 독립전쟁에 참가하고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박창욱교수의 지적이다.</P>
<P>연변일보 서봉학 2006년 02월 03일</P><!-- --><!-- end clix_conte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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